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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고잘쓰고잘말하기

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보조작가 김국시의 생활에세이)

한 번은 책을 받자마자 금세 읽었고
한 번은 서평을 적기 위해 천천히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
맨 앞장 행운의 편지를 보자마다 빵 터지고 어떻게 이런표현을 쓸 수가 있지 놀라면서 연신 킥킥킥,
이건 분명 휘핑크림의 달콤한 맛이었다.

다시 읽을 땐 
만년 손님이었던 보조작가로서의 고단함, 막내로서의 설움, 비정규직의 씁쓸함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서
중후하고 쌉쌀한 커피의 맛이 느껴졌다.

프랑소와 엄님의 추천사에 적힌 아인슈페너의 맛!! 딱 그거였다. 올레~~~!!!!

 


📙 방송작가도 여러 분야이다. 난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다큔팀 막내작가, 교양프로그램 서브작가, 드라마 보조작가, 아침뉴스팀 해외토픽 작가. 뜬금없지만 사람의 에세이집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진득하니 뜨거운 물 에몸을 담그지 못하고 벌거벗은 채 냉탕, 온탕, 미지근한 탕, 찻물 우러난 탕, 이런저런 탕탕탕을 떠도는 경박한 모양새다. .. 여기저기 깔짝대다 둘러보면 같은 곳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벅벅 때 빼고 광내고 있는데, 나는 '아아... 아직 때가 안 불었어.'하며 눈알을 굴리며 앉아 있다. 쪼그라들어가는 손끝만 매만지며.

 

아~~ 목욕탕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왜케 웃음이 나오는지..이거 처음부터 너무 재밌는데..

 

 

📓학창 시절의 나는 단순해서 행복한 게 아니었다. 삼시 세끼 밥을 먹고 배가 불러서 행복한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성적표로 혼을 내지 않아서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불행할 이유가 없어서 행복했다.

 

 

📔사나워진 나의 감정이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도록 입마개를 하고 목줄을 짧게 졸라맸다. 나의 개는 숨이 막혀 낑낑댔다. 한 번 짖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다른 이의 발에 치였고, 나는 내 감정이 학대당하는 모습을 방관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느라, 내 감정 따위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무심한 사이, 몇 년이 훌쩍 지났고 그제야 후회됐다. 나의 개는 더 이상 밥그릇을 보고 꼬리 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함께하길 바란다.. 

 


📘드라마 보조작가로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일은, 수영을 못하는데 태평양 한가운데 빠진 것쯤으로 볼 수 있겠다.
도저히 할 수 없는 걸 해야만 하는 거다.

 

 

📕그게 뭐든 달 작가님이 옳은 것 같았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처럼 되고 싶다고 입맛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둘의 입맛은 다르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입맛을 맞추고 싶었다. 함께 뜯고 씹고 맛보며 우리가 동족이라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었다. 차라리 굴하지 않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처럼, 미친 척 나의 아이디어를 계속 제시했으면 나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란 것을 지우고 작가님의 방식대로 생각하려 애썼다. 안 됐다. 아이디어가 까여도 계속 계속 계속 개소리든 헛소리든 

지껄여야 하는데. 안됐다. 아이디어가 까일 때마다 뺨따귀를 후려 맞는 기분이었다. 이미 퉁퉁 부운 볼을 또 내밀지 못하고 나는 움츠러들었다. 아이디어 회의 때면 정적이 흘렀다. 

 


📗나의 건강 따위 배려하지 않고 설탕에 몸을 던진 애들. '나는 달다. 먹을 테면 먹어라' 하고 손님이 오든 말든 찜질방 단골들처럼 무신경하게 누워 있는 애들, 그런 것들이 좋다. 촌스러울 만큼 제 모습에 솔직한 것들. 긴장을 풀다 못해 흐물거려서 내 근육마저 말랑하게 만드는 상황들. 조금 덜 익은 채로 진열대에 선발투수로 나선 과일 같은 사람들. 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싶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게 된다. 

 


📕방송국이 프리랜서 작가를 가족처럼 대하는 유일한 시간은 일할 때다. 일할 때만 되면 한집 사는 가족처럼 삼시 세끼를 함께 먹으며 낮이고 밤이고 동고동락하려 한다...잠이 모자라 피곤해 죽겠는데 쓸데없이 안 웃긴 메시지나 짤 같은 걸 보내고, 잔소리에 상처 주는 말을 서슴없이 하면서도 항상 붙어 있어야 하는 관계.   혈연보다 징한 금연으로 엮여 있어서 간절히 끊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관계, 가족하지 일하자는 말은 네가 무상으로 희생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보라는 말이다. 

 

 

📗고향집에 내려갔는데 언니는 회사에서 받아 온 한우를 부모님 앞에 턱 들이밀었다. 자식 키운 보람이 있다며 다 같이 한우를 구워 먹을 때, 나는 또 매직아이를 하고 싶었다. 명절이 오기 전까진 그런 일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다. 가족같이 일했지만 프리랜서 작가는 결코 가족이 될 수 없었다.

 

 

📔"복사를 멍청이같이 해가지고~~!"

나는 강-약-중강-약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그 1년은 사랑니 같았다. 아직 어렸던 내가 처음 겪어본 통증. 살을 째고 실체를 보면 별것도 아닌데. 너 따위가 나를 그렇게 괴롭혔다니, 허망했다. 일이 끝난 뒤엔 앓던 이가 있기나 했었냐는 듯 멀쩡해졌다. 

 

📘"반년이 지났으면 이제 좀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음파가 내 귀에 닿았고 진동을 뇌가 해석해 온몸으로 의미를 헤아렸다. 찌릿찌릿.

작업실이 아닌 치과 의자에 앉은 기분이었다. 평소 감각하지도 못했던 곳곳이 소름 끼치게 시려 왔다. 나는 그동안 제대로 갈고닦지 못한 죄로 치부가 갈려나가는 누렁니였다. 지잉지잉. 시리고 아파 눈물이 찔끔 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 못 참고 방치하면, 갈려나가지 않으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서 꾸욱 참았다. 이후에 나는 더 꼼꼼히 갈고닦으려 노력했다.. 보탬이 되려고 애썼다기보단,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부끄러운 누렁니가 드러날까 봐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근로계약서나 퇴직금, 4대 보험 같은 기본적인 것들.없는게 너무 당연해서 없다고 말하는 것조차 새삼스럽다. 마치 내가 고개를 꺾어 내 궁둥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나는 꼬리가 없어"라고 말하면 "빙구야, 그걸 말이라고 하니"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처럼. '없다'는 게 그렇게나 당연하다. 

 

📗나는 여전히 막내처럼 살아가야 할 예정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며 천진난만한 채로. 사실 진짜 막내의 어원은 '이제 막 사람이 된 이'를 뜻한다. 마지막이 아닌, 이제 시작이라는 의미다. 물론 내 생각이다. 

 

 

📔책을 읽고 나면 어떤 내용이었나 되집기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 생각의 찌꺼기를 그러모아 퍼즐을 맞춰보면 나라는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 대강은 보인다. ⠀

 

 

📘편집자는 잠시 후 "(그림은 됐고) 혹시 글 한번 써보시지 않을래요?"라고 했다.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강 떠오르는 이야기의 꼭지를 쑤욱 뽑아봤는데 거친 자음과 모음 사이로 흙덩이가 뚝뚝 떨어졌다. 다듬지 않은 이야기의 뿌리들이 머리채를 잡듯 뒤엉켜 잇었다. 문장 사이로 어리숙한 비린내가 풍겼다. 어리둥절해하는 이야기를 탈탈 털어서 종이 위에 얹었다. 글은 내 시간 속에서 별다른 비료도 없이 저 혼자 쩡쩡 다리를 내뻗으며 자라고 있었다. 대체 나의 이 낯선 재료들로 뭘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작 이 정도의 삶을 위한 거였다. 고통스러워하며 구구단과 알파벳 철자를 외우고 '이건 앞으로 내 인생에 절대 필요하지 않을거야' 생각하며 수식을 적어 내려간 시간들이. 그게 모두 이 정도의 삶을 위한 거였단 것 알았다면 공부하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 같다. 적당한 크기의 집에 털이 부숭부숭한 고양이 두 마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먹고 싶을 때마다 맥주캔을 따 꼴꼴 따라 마시며 안주는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낮과 밤이라면. 이 시간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제 편의점에 들렀을 때 
우연히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을 보게 되면, 
카페에서 아인슈페너 커피를 맛볼 때면, 김국시 작가님이 떠오를 거 같다. 😊

 

 

📍서른 살 겨울, 나는 예상과 달리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높이 자라지도, 눈에 띄지도 않은 채였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이끼였던 것 같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해 곧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는데 여전히, 조용히,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