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현작가님을 알게 된 것은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통해서다.
이 책이 인상깊어 독서모임에서 이야기한적이 있고 몇달 후인 오늘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누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 책이 그 때 있었더라면,
더 일찍 조울증에 대해 알았더라면 좀 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을텐데 내 무지로 인해 받았을 상처가 내내 미안해졌다..
🔖조증의 봉우리가 높으면 울증의 골도 깊다, 격렬한 조증은 그만큼 깊고 짙은 우울을 드리운다. 조증과 울증은 서로를 질투하며 복수극을 펼치다. 조증을 내버려두면 뒤이어 찾아온 울증이 더욱 집요하게 공격한다. 조증을 그리워할수록 울증은 떠나지 않는다. 당시 내몸은 조울의 전투장이었다. p.36
🔖 조증의 주요 특이점 중엔 '타인과의 거리'를 제대로 재지 못한다는 게 있다.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경계를 마구 무너뜨리고 함부로 침범해버린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현재의 황홀경에 홀딱 빠져 있는 조증 환자에게 '지금''여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다.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인데도 홀딱 반하기도 한다. 나를 타인으로부터 지켜주던 거리는 해체되고 정돈되지 않은 관계가 남는다. 나 홀로 기대하고 나 홀로 바라고 나 홀로 사랑하고, 그래서 나 홀로 분노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p.45
🔖 조증은 자신에 대한 몰입이자 스스로에 대한 황홀인 동시에 타인과 관계 맺음에 대한 몰입, 감정 투사의 남발이다.. 조증을 방치할 경우 신경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발병 시기에 훼손된 사회적 관계, 과소비,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한 파산 등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조증 이후 찾아오는 우울이 더 깊어지고, 이후 찾아오는 조증의 봉우리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p.50
🔖아무리 '환자'로 불리길 거부해도 가슴 한켠에선 정말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진짜 환자임이 명백해질 경우 덮쳐올 엄청난 절망감을 회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p.57
🔖조증에서 벗어나자 날마다 축제 같았던 흥분이 사라졌다. 아무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귀찮았다. 의사는 "조증일 때는 주변 사람들이 힘들고, 울증일 때는 본인이 힘들다"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이었다. 소리치고 울고 저항하던 조증시기, 가족들은 쩔쩔맸다. 그러나 이젠 내가 무기력감에 쩔쩔맸다. p.67
🔖어린 시절의 경험이 조울병의 범인은 아니지만, 후일 조울병이라는 낯선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 놀라운 식탐을 채워주는 먹거리인 건 분명해 보인다. 조울병은 망각의 냉동고에 갇혀 있었던 일들을 불러내 기억력으로 소생시킨 뒤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병이다. 감정을 끄집어내 뼈를 다 발라 먹다시피 악착같이 후벼 파고 증폭시킨다. 조증이 점령한 머릿속에선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 형광물질이라도 발라진 듯 총천연색으로 다가온다. 울증 시기엔 조증 때처럼 생생하진 않지만 과거의 기억이 물밑에서 발목을 잡아당기는 물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다. p.81-82
🔖조울병은 과거의 일이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든 감정을 증폭시켜 스스로 그에 휘말리는 경향이 있다. 할머니는 내 유년의 '뒷마당'이었고, 나는 이 지나간 뒷마당의 세계에 집착했다. p.102
🔖내가 열심히 공부한 것은 본래 가지고 있던 열등감, 콤플렉스, 승부욕, 끈기, 집중력 등 자발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았다. 강한 욕망에 따라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내면의 억압'도 그에 비례해 쌓여갔다.. 이처럼 공부 일색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은 후일 조증 시기에 엄청난 분노로 터져나온다. 한국의 학벌주의, 여기에 편승한 부모와 교사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내가 '공부 기계'가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07
🔖's'라는 멋진 뿔을 얻기 위해 나는 온종일 의자에 앉아 얼마나 많은 칼슘을 뽑아 올렸던 걸까. 물론 내가 청소년기에 공부만 하다가 조울병을 앓은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골다공증 때문에 조울병에 더 취약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인생은 균형의 문제니까. p.109
🔖'여리고 어리숙한 고등학생'에서 마음이 한 뼘도 자라지 않은 채 낯선 환경에 혼자 뚝 떨어진 나는 그저 막막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국의 청소년은 그 나이 때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나 시험에 나오지 않는 교양을 빨아들일 기회가 유예된다. 대입 전까지는 무용한 즐거움을 보류해달라는 어른과 사회의 요청에 고분고분하게 살아왔던 나는 선배와 일부 동기들이 교과서 밖에 있는 것도 많이 알고, 또 음악, 영화, 스포츠,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교양과 오락에 훤하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나처럼 교과서에만 코박고 있다가 대학에 온 게 아니었다. p.112
🔖슬픔과 우울은 어깨를 마주하고 찾아올 때가 많지만 본질적으론 다르다. 슬픔은 이유가 있다. '나'와 잃어버린 것/사람'을 분리할 수 있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이 슬픔이 언젠가는 다할 것을 짐작할 수 있다..슬픔은 위로하는 타인과 교류할 수 있다. 반면, 우울은 실체 없는 어떤 것이 주변을 채우고 목을 조르는 느낌이다. 의지, 목표, 흥미가 마비된다. 모든 것이 메말라간다. 슬픔이 감정의 습지라면, 우울은 감정의 사막이다. 그것도 사하라 같은 열사의 사막이 아니라 남극 같은 동토의 사막. 우울은 귀를 막는다.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우울은 '셀프 감금'이다. p.122-123
🔖나중에 이 시기의 경조증과 울증의 실체를 알게 되자, 두 가지 모순되는 감정을 느꼈다. 이 병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절망감과 불안감이 한 축이었다면, 이 시기에 일어난 또는 일으킨 크고 작은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또 다른 축이다. 난 아팠던 것이다.
불행에 물음표를 찍거나 저항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진실의 중요한 조각이다. 조울병을 그냥 내 부분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실 지금도 자유롭지 않다. 약과 상담으로 단단히 죄어오는 조울병의 고삐가 언제 풀릴지 몰라 두렵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다. 짜고 달고 쓰고 매운 맛을 봤다. 때론 비릿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내 인생은 간이 잘 맞는다. p.138
🔖만약 의사가 가능한 모든 환자에 공감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무지막지한 감정노동을 도저히 체력적으로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의사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것이 환자에게 반드시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무조건적인 이해와 공감을 해주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정확하게 인지하도록 도와주는 게 더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상태의 환자에게 인간적 좌절감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 p.163
🔖새약은 풍선 끈에 달아놓은 돌멩이와도 같았다. 날개 달린 감정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도록 잡아줬다. 닻과도 같았다. 내가 원한다면 불안의 폭풍우를 피해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p.167
🔖환자들도 알고 있다. 조울병을 앓기 이전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노력한다고 해서 재발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사가 환자를 돕는 방법은 재발이 없을 거라고 안심시키는 게 아니라 환자가 위기에 봉착할 때 '모든 것'을 잃지 않고 헤쳐나올 수 있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환자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훈련할수 있도록 지켜보고 장려하는 것이다.. 불행이 발생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지만, 이런 훈련을 계속한다면 극복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p.173
🔖사실, 우리의 목표는 치료가 아니라 치유여야 한다. 미국의 가정의학 전문의 웨인 조나스는 <환자주도 치유 전략>에서 치유는 "잘 살고 있는 느낌' '자신에게 가장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질병의 증상을 완화하거나 없애는 치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환자들이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 치유로 향할 때 진짜 병이 나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질병에서 자유로워졌음은 아프지 않다는 게 아니라 행복을 회복했다는 의미다. P.182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행위는 극한 상황에서도 숨통을 틔울 수 있는 한 조각 작은 마당이자, 자기 위로의 습관이자, 위축과 고립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 된다. 조울병은 불가역적인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를 다독여야 하는 상대다. 글을 쓰면서 나는 이 까다로운 파트너의 정체를 곱씹고 내게 끼친 파괴적 영향력을 정리할 수 있었다. 가족들이 나로 인해 흘린 눈물을 기록하며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았으며 좌절의 늪에 빨려들어 질식사할 정도로 내가 허약하진 않다는 걸 믿게 됐다. 글쓰기가 고통을 없애주진 않지만 고통을 관통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길러준다. P.187
🔖웃음과 행복은 총액을 알 수 없는 적금 같다. 자꾸 웃어야 웃을 일이 생기고, 자주 행복을 느끼면 행복해진다. 입금을 많이 하면 출금 액수도 많아진다. 심란할 때 예전의 행복한 순간을 담은 사진이나 동영상, 일기, 메모를 보면 과거의 내가 튀어나와 손 흔들며 격려하는 기분이 든다. p.223
<에필로그>
조울병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현실과 광기 사이의 좁은 틈에 끼여 심연을 바라보았다.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넘쳐나는 감수성과 창의성, 자발성을 경험했다.. 조울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개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내준 지지와 응원에 이처럼 마음 깊이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랐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교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 책.
'나는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런 마음이 아닌
'누구나 조울의 사막을 건널 수 있어.' 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책
'정신의 골다공증'에 걸리지 않게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삶을 고민하게 되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조울의 사막을 꿋꿋히 건너온 삐삐언니 이주현 님에게
무한응원을 보내게 된다 💕
'잘읽고잘쓰고잘말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첫소설_소나기와 우산 (0) | 2020.08.27 |
---|---|
저는 측면이 좀 더 낫습니다만_하완 (0) | 2020.08.21 |
평일도 인생이니까_김신지 (0) | 2020.08.05 |
기록의 쓸모_이승희 (0) | 2020.07.30 |
나는 잘 살고 싶어 나누기로 했다(4장) (0) | 2020.07.24 |